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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2020.04.03>[성범죄법 잔혹사]①여성이 죽고, 분노해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4-08

    조회

    69
     
    내용

    [ 성범죄법 잔혹사 ]

    ①여성이 죽고, 분노해야 …법은 바뀌었다.



    고희진 · 탁지영 기자 gojin@kyunghyang.com


    67년째 사후약방문 입법


    성범죄법.jpg

    1953년 처벌 규정 마련 뒤 친고죄 폐지되는 데 60년 2018년 서지현 미투 이후 ‘비동의 간음죄’는 제자리


    법은 언제나 한발 느렸다. 성범죄에 대한 처벌 규정이 마련된 1953년 이후, 60년이 지나서야 친고죄 조항이 폐지됐다. 조두순, 강호순, 김길태, 김수철…. 이름만으로 사회를 공포에 몰아넣은 이들의 잔혹한 범행 뒤에야 한국 사회는 성범죄자 처벌과 관리를 논의했다. 피해자의 눈물과 여성들의 분노가 없었다면, 성범죄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1953년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2020년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아동·청소년 등의 성착취물이 유포된 ‘n번방’ 사건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현행법상으로 구제받지 못하는 피해자, 처벌받지 않는 범죄자들이 있다. 

    ‘정조에 관한 죄.’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성범죄와 관련된 제32장의 제목이었다. 1955년 박모씨는 자신을 해군 대위라고 속여 여성 70여명을 농락했다. 혼인빙자간음죄로 법정에 선 그에게 1심 법원은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박씨와 만난 여성들이 문제라는 취지였다. ‘정조에 관한 죄’는 40년이 지난 1995년에야 개정을 통해 ‘강간과 추행의 죄’로 명칭이 바뀌었다. 성범죄에 대한 법 인식은 ‘왜 짙은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를 입었나’ ‘왜 늦은 밤에 외출을 했나’라는 질문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데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 초 연달아 터진 비극적인 사건들은 1994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특별법)’ 제정의 발단이었다. 1991년 서른 살이던 김모씨는 어린 시절 자신을 강간한 이웃집 남성 송모씨를 살해했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 송씨를 고소하고 싶었지만, 공소시효 만료 등으로 법으로 처벌할 수 없음을 알게 돼 송씨를 살해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법정에서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다”고 말했다. 1992년에는 대학생 김모씨가 남자친구와 함께 의붓아버지를 살해했다. 김씨는 수사과정에서 9세 때부터 13년 동안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고백했다.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였던 여성들의 사건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성폭력이 피해자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하는지 깨달았다. 부산성폭력상담소 등 12개 단체는 1991년 8월 성폭력특별법 제정추진 특별위원회를 결성했다. 3년간의 입법 추진 활동 끝에 성폭력특별법은 1993년 12월17일 국회를 통과했다. 

    성폭력특별법은 법의 목적을 설명하며 ‘성폭력 범죄를 예방하고 그 피해자를 보호한다’는 부분을 우선했다. 가해자 중심 사고에서 피해자 중심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됐다. 법은 가해자 처벌뿐만 아니라 성폭력피해상담소, 보호시설의 설치 및 경비의 보조 등을 규정했다. ‘친족관계에 의한 강간 등’에 대한 조항이 들어가 ‘친족 성폭력’이 법적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1997년 개정 때는 13세 미만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을 비친고죄로 규정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심리적 안정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동석을 허용함으로써 피해자 보호도 강화했다. 성폭력특별법은 2011년 폐지되고, 이후 여성가족부 관할의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과 법무부 관할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등으로 분할 시행됐다.

    1993년엔 국내 최초의 ‘성희롱’ 소송이 있었다. 1993년 서울대 화학과 실험실에서 1년간 유급계약직으로 근무하던 우모 조교는 상급자인 신모 교수에게 지속적으로 신체접촉을 당하고 성적 발언을 들었다. 우 조교가 항의하자 신 교수는 우 조교의 재임용 추천을 하지 않았다. 우 조교는 억울함을 알리는 대자보를 교내에 붙였다가 신 교수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사건이 알려진 뒤 12개 여성·시민단체, 서울대 총학생회가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신 교수와 서울대,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지원했다. 6년간 법정공방 끝에 1999년 서울고법은 신 교수에게 우 조교의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며 500만원 지급 판결을 했다. 신 교수 사건은 국내 최초 성희롱 소송 사건으로 불린다. 이전까지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성적 접촉은 단순한 ‘추태’나 ‘친밀감의 표시’ 정도로 여겨졌다. 상대방의 동의 없는 신체적 접촉과 ‘농담’으로 치부되던 성적 행위 역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인식을 사회에 각인시켰다. 

    2008~2010년 사회에 충격을 준 성범죄자들이 잇달아 등장했다. 2008년 12월, 조두순은 등교하던 8세 아동을 인근 교회로 유괴해 성폭행했다. 피해 아동은 전치 8주 이상 상해를 입어 생명이 위험했다. 조씨는 범행 당시 음주를 해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감경받았다. 조씨는 당시 12년형을 선고받았고 오는 12월 출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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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아동 성범죄자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에서 행한 성범죄에 감경 규정을 적용하지 않도록 성폭력특례법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었다. 조씨가 죄질에 비해 낮은 12년형을 받자 시민들은 분노했다. 출소일이 다가오자 우려도 늘었다. 2019년 4월부터 ‘특정 범죄자에 대한 보호관찰 및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 일명 ‘조두순법’이 시행됐다. 이에 따라 미성년자를 성폭행해 전자발찌를 착용한 범죄자는 주거지역이 제한되며 특정인에 대한 접근이 금지됐다. 

    2009년 경기도 일대에서 10명의 여성을 연쇄살인한 강호순이 붙잡혔다. 조씨에 이어 여성을 대상으로 한 흉악범죄가 잇달아 발생하자 범인의 얼굴을 대중에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가 늘었다. 이에 2010년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얼굴 등 신상정보를 공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특정 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2010년 중학생을 성폭행하고 시신을 물탱크에 유기한 김길태, 초등학교에서 여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한 김수철 사건이 터졌다. 두 사람 모두 성폭행 전과가 있었지만, 위치추적 대상이 아니었다. 2008년 9월 ‘특정 성폭력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에 관한 법률’(전자발찌법)이 시행되기 전에 수감됐기 때문이다. 이에 2010년 법무부는 법 시행 이전 성범죄자에게도 전자발찌를 채울 수 있도록 하는 전자발찌법의 소급 적용 근거규정을 마련했다. 

    2013년에는 성범죄 관련법이 만들어진 지 60년 만에 모든 성범죄에서 ‘친고죄’ 규정이 폐지됐다. 여성계는 그간 친고죄 폐지를 위한 다양한 운동을 벌였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 역시 잔혹한 피해가 발생하고 나서야 가능했다. 영화 <도가니>의 배경이었던 ‘광주 인화학교 교장 성폭행 사건’이 그것이다. 피해를 입은 장애인들은 성폭행 범죄를 신고하기 어려웠고, 이들의 부모조차 장애인이거나 가난한 경우가 많았다. 친고죄 폐지 목소리가 커졌고 2011년 장애인 대상, 2013년 모든 성범죄에 대해 친고죄가 폐지됐다. 

    2018년 성추행 피해 사실을 고발한 서지현 검사를 시작으로 한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열었다. 이후 연극계, 체육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다수의 피해자가 위계에 의한 성범죄를 증언했다. 이 운동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동의 없이 성적인 행위를 한 경우 처벌하는 ‘비동의간음죄’ 신설 논의를 불렀다. 2018년 9월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에 이 내용이 들어갔지만, 이후 논의가 진전되지 못했다. 


    ■성폭력 피눈물 멈출 ‘21세기형 예방 입법’ 더 늦춰선 안된다  

    올해 2월,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 ‘박사방’에서 아동·청소년 등의 성착취물을 무차별 유포한 조주빈(25)이 검거됐다. 박사방을 포함해 n번방 등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은 경찰 조사로 밝혀진 인원만 103명이다. 이 중 26명이 10대다. 

    현행법에 따르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 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와 ‘(불법촬영 영상을) 반포·판매·임대·제공 또는 공공연하게 전시·상영한 자’는 5년 이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여성단체들은 ‘성적 욕망을 유발하는 사람의 신체’는 여전히 모호한 규정이라 지적한다. 반포와 제공 외에 아동 성착취물이 아닌 성인의 성착취물을 ‘시청’ 혹은 ‘소지’한 이를 처벌할 법규가 없는 것도 문제다. 

    ‘강간죄 개정’ 법안 10개 20대 국회서 폐기될 운명

    전문가들은 시대 변화에 맞춘 성폭력 예방 입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20대 국회에 강간죄 개정안은 5개 정당 10개 법안이 나왔지만 국회 만료와 함께 모두 폐지된다. 정치권에 실망한다”며 “법의 변화는 시민에 대한 교육 기능도 있다.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 접촉이 문제라는 인식이 사회에 정착하려면 법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장명선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교수는 “‘정조에 관한 죄’ 항목은 여성계의 지속적인 요청에 1995년에야 개정됐다. 현재도 (성폭력범죄에 관한) 법망이 촘촘하지 않다”며 “성범죄에 관한 한 한국 사회에서 과잉입법은 없었다. 국회가 여성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새롭게 나타나는 범죄에 대비한 입법화 논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